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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신의 조약돌/서양철학

레비나스의 철학2): ‘이름 숨김의 존재’(il y a)

영강풍음 2021. 7. 14. 00:32

Ⅰ. 개념 생각해보기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상상 가운데에서 모든 사물을 파괴해보자. 그러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남은 것은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il y a)라는 사실 뿐이다. 모든 사물의 부재는 현존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장소, 대기의 밀도로, 텅 빔의 가득 참으로, 침묵의 중얼거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탈무드 주석가이다. 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았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하다 1928∼192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으면서 현상학을 연구한 뒤 1930년 「후설 현상학 직관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부모와 동생들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탈무드를 연구하였다. 이 연구는 자신의 생애 후반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한, 수수께끼의 인물인 무슈 슈샤니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후 1961년 「전체성과 무한」으로 국가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타자성에 대한 철학’을 연구한 철학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논문을 심사한 얀켈레비치는 “당신이 여기 내 자리에 앉아야 했을 텐데요”라고 극찬했고 리쾨르는 「전체성과 무한」의 논문 심사 후 “이제부터는 그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 저서로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전체성과 무한』(1961), 『존재와 다르게』(1974)가 있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가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계획 아래 ‘통일적인 단일한 작품’으로 완성한 세 권 중 하나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쓴 이 책은, 타자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려는 서양 존재론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상실하고, 타인을 자신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비판이나 휴머니즘적인 대안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닌, 서양 철학의 바탕에서 유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주체의 계산과 규정 아래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을 말하면서, 이 ‘무한한’ 타자를 통한 나의 초월을, ‘윤리적 책임’이 곧 ‘구원’이 되는 순간을 말한다. 이러한 독특한 사상을 통해서 철학의 하위 분과로 윤리학이 아닌 ‘제1철학으로 윤리학’을 보여주는 이 책은, 다시 포성(砲聲)과 초연(硝煙)이 드리운 이 세계에서 ‘타자’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한다.

- 출처 : 민음사


일리야

어떠한 ‘존재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순수한 무도 아닌 것과 같은 배제된 제3항으로 ‘존재 일반’, ‘실존자 없는 실존’의 비인칭적 양상을 나타내기 위해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용법이다. ‘있음’은 잠들지 못하는 밤의 ‘감시’, 방황하는 망령, 술렁거리는 침묵, 리듬의 결여로 이루어지는 리듬과 같은 말들로 말해지지만, 거기에서는 산 채로 불태워진 자들의 말없는 부르짖음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있음’은 관대한 ‘증여’, 장소의 비워줌과는 정반대 의미를 갖는다. 전후의 레비나스의 사유는 이와 같은 ‘있음’의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있음’은 블랑쇼(Maurice Blanchot)와 레비나스의 가까움을 표시하는 관념임과 동시에, ‘있음’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랑쇼와 레비나스의 근본적 차이를 나타내는 관념이기도 하다.

-출처 : 고다 마사토(合田正人), 네이버 지식백과, 현상학사전.


Ⅱ. 개념 확대하기

1. 이름 숨김의 존재(Il y a, There is)

프랑스어 ‘il y a(there is)’는 il(=it) + y(=there) + a(= have ※ avoir의 3인칭 단수형), 영어의 there is(there are)로 ~이 존재한다(있다)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il y a’(존재)를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Existence and Existents. 1947)에서 ‘il’이 비인칭 주어임을 빌어, ‘il y a’를 ‘있는 것’이 뚜렷하지 않은 ‘그저 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그저 있음(il y a)’은 어두운 깊은 곳, 있지 않는 장소, 이름 숨김의 ‘있음’이다. 그는 이를 카오스라 이름 부른다. 여기서 카오스는 “우주는 박살나고, 그 뒤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카오스, 즉 깊은 곳, 있지 않는 장소, 있음이 남아있다”를 의미한다.
-E, Levinas, 서동욱 역,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3, 118쪽.
세계는 무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로 시작한 것이다. 카오스는 분절과 분리가 없고 따라서 주체성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카오스에서 분절과 분리되어 질서 지어진 존재자들이 출현하고 세계가 만들어 졌다. 따라서 구체적인 존재자 탄생은 ‘존재 일반’이 되며, 이는 동사형(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으로 표현될 수 있는 존재자의 ‘있음 사건(il y a)에서 비롯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il y a)는 무거움과 어두움으로 무시무시함, 두려움을 의미한다. (-E, Levinas, 양명수 역, 『윤리와 무한』, 다산글방, 2000, 56~57쪽.) 여기서 인간은 ‘없는 것에 대한 마음 편하지 않은 불안’이 아니라 이름을 숨기며 다가온 ‘존재에 대한 마음 편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 ‘마음 편하지 않음’은 불시에 습격해 오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존재가 인간에게 문제인 까닭은 존재가 지닌 이름 숨김과 어두움, 인간에게 주는 공포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으로 이름 숨김의 ‘존재’를 레비나스는 ‘존재자 없는 존재(Existing without existents)’라 부른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이며 최초의 의미는 현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자 없는 존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즉 ‘il y a’를 통해 존재 사건을 세계와 세계-내-존재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세계 이전의 ‘이름 숨김의 있음’에서 시작하여 하이데거의 세계와 세계-내-존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묻고 있다.


2. 존재자 없는 존재, 이름 숨김이며, 비명사인 존재

상상 가운데에서 모든 사물을 파괴해보자. 그러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남은 것은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ily a)라는 사실 뿐이다. 모든 사물의 부재는 현존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장소, 대기의 밀도로, 텅 빔의 가득 참으로, 침묵의 중얼거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파괴된 후 존재하는 것들의 비인칭적인 ‘힘의 장(場)’이 있을 뿐이다. 주어도 아니고 명사도 아닌 것,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스스로 부과하는 존재함의 사실, 이제 이것은 이름 숨김이다. 이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사물이나 사람은 전혀 없다.
- E, Levinas, 강영안 역,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40쪽.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존재했던 ‘어떤 것’의 모양이나 자취가 차차 없어지고 ‘있음’이라는 그 본디 바탕만 남아있다. ‘누구’라고 부르던 것,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자취나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사건만 존재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3. 본질은 이름 숨김이다

존재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흩어지듯 있는 상태는 ‘밤의 어두움’과 ‘잠잘 수 없는 깨어있음’이다. 밤의 어두운 상태가 쳐들어오면, 정하지 않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떠한 사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보편적 있지 않음은 하나의 ‘있음’, 절대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할 하나의 ‘있음’이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있음’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있음’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명사인 ‘있음’과 다른 의미이다. 존재 일반은 ‘눈이 온다(il neige)’, ‘날씨가 춥다(il fait froid)’고 말할 때처럼 인격이 없는 모양이다. 때문에 존재 본질은 이름 숨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가 어두운 밤 속에 휩쓸려 버리며, 밤에 의해 침범당하고 비인격화되고 질식되어 버린다.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자아가 사라진 뒤에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 남는다. 이제 싫든 좋든 간에 자발적인 주도권도 없이 이름 숨김으로 모든 자들이 참여하는 존재의 사실 자체가 남는 것이다.”
- 『존재에서 존재자로』, 94쪽.

밤의 어두움은 ‘주체 이전의’ 이름 숨김과 치우침 없이 중간에 있는 존재 경험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존재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반대로 존재에 자신을 맡겨버린다. 어둠 속에 잡혀 독립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신에 대한 존재를 주장할 수 없게 됨을 뜻한다.


4. 잠잘 수 없는 깨어있음에 대한 경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잠잘 수 없는 깨어있음에 대한 경험’이다.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잠들 수 없는 뒤척이는 깨어있음은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려운 상태로 통제할 수 없는 주체이다.
잠들 수 없는 뒤척이는 깨어있음은 그곳에 있지 않음이 남기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있음’의 제자리 돌아옴 자체이다. 여기서 제자리로 돌아온 회귀한 어떤 것의 회귀가아니라 ‘있음’의 현전자체의 회귀인 것이다.-『존재에서 존재자로』, 109쪽.
잠잘 수 없는 깨어있음은 불면의 상태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식, 즉 우리를 붙잡고 있는 ‘깨어 있음’의 상태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있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깨우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잠잘 수 없는 깨어있음에 대한 경험이다.
-E, Levinas, 강영안 역,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41쪽.

깨어 있음은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밤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는 것은 밤 자체이다. 그것은 깨어있다. 이 이름을 숨기는 깨어 있음 속에서 나는 완전히 존재에 노출되어있다. 이러한 비인격화의 경험은 비인격화의 조건들(깨어 있는 불면 상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이 비인격화를 손상시키는 일에 선행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 『존재에서 존재자로』, 110~111쪽.

의식 주체는 잠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달아나지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다만 깨어 있음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잠들지 못하는 깨어있음에서 주체는 현존 자체, 얼굴도 이름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 자체’에 싸여 있는 ‘이름을 숨기는’일일 뿐이다.
깨어 있음의 경험을 통해 레비나스는 주체를 그 텅 빈 깨어 있음 속에 사로잡히고 있는 순수한 현존이 다름 아닌 ‘존재한다’는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존재는 주체 없는 존재이며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격이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무의미한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게 됨을 의미한다.

Ⅲ. 개념 정리하기

1. 주체의 자리 잡기(hypostase)

프랑스어 이포스타즈(hypostase)는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뜻하는 본질·실체·주체에 대한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존재의 이름 숨김에서 ‘실체’로 자리 잡아가는 존재자의 홀로서기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1)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
이름 숨김 상태에서 존재자는 힘없이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선 주체와 타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카오스(chaos)와 같은 상황만 있을 뿐이다. 침입해 들어오는 이름 숨김 상태의 조용함을 철저하게 쳐부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을 경험하게 한다. ‘불면’은 이름을 숨기고 있는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이 無에 대한 경험은 아니다.
레비나스는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란 밤 그 자체만큼 이름 숨김이라 말한다.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는 있지 않음이 남겨 놓은 텅 빈 공간 속으로 현전하는 되돌아감 그 자체이며 정해지지 않은 한복판에서 ‘그저 있음(il y a)’의 살아남이다.
이렇게 이름을 숨기고 소리 없이 침투해 들어와도 우리는 이를 쳐부술 수 없다. 깊은 잠을 자고 싶으나 잠을 잘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잠을 깨우지 않고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다.
잠을 잘 수 없는 주체는 수동 상태로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그저 있음’의 현전일 뿐이며 이것은 어떤 의식의 기능도 아닌 사물들과 의식 모두를 끌어안은 이름 숨김 존재의 보편적 사실일 따름이다.

2) 거기(Da)가 아닌 여기(ici)
규정되지 않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체가 서야하는 자리는 ‘거기(Da)’가 아닌 ‘여기(ici)’이다. 이는 자신을 벗어나 그냥 의미 없이 내 던져져 있는 ‘거기(Da)’의 존재자가 아니다. 의미 없음과 이름 숨김으로 꽉 차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여기(ici)’는 바로 자신의 내면이다.

3) 잠
의식하는 자아(cogito)의 탄생은 ‘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름을 숨기고 있는 존재 속에 어떤 존재자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났다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자기 동일성 작업 자체가 가능해야 하는 이유이다.
의식은 잠이라는 무의식으로 사라졌다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깨어 있는 것’으로 자기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의식은 ‘잠을 자는 능력’이 된다.

휴식으로부터, 자리 잡기로부터, 장소와의 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로부터 의식은 도래한다. 의식이 결정하는 것은 어떤 행위 같은 것과 달리, 자리는 의식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자리로부터, 부동성으로부터 출발해 의식은 스스로에게 도래한다.
의식은 존재에 연루되어 있으며, 이 존재는 잠의 비연루성 속에 머무르는 데서 성립한다. 의식은 기반을 소유하며, 장소를 소유한다. 여기서 소유란 장소 차체가 아닌 오로지 조건을 말한다.
- 『존재에서 존재자로』, 117쪽.

4) 비시간적 현재
잠을 통해 의식은 자리 잡기(hypostase)를 한다. 이러한 바로 섬이 일어나는 장소는 여기(ici)이며, 아주 짧은 순간(instance)은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코기토의 참을 보증하는 발판과 같다. 존재자 없는 존재인 이름 숨김의 존재(il y a) 사건은 규정되어 있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한성(시간)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는 사건이다. 모든 사물들의 있지 않음의 현전은 시작과 끝이 없다. 존재는 나가는 곳이 없다. 이 출구 없는 존재로부터 존재자가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사건의 아주 짧은 ‘순간’이며 지금 여기 ‘현재’이다. 존재자 사건은 구체적 현재 속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속 사건이 아닌 비시간적 사건이다.

5) 자기 정립(hypostase)의 의미
자리 잡기는 이름 숨김의 있음 속에서 스스로 주체를 드러난다. 있음의 이름 숨김인 불면과도 같은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주체는 사유나 의식 또는 정신으로 나타난다.

출처:독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