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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신의 조약돌/서양철학

레비나스의 철학1):타인은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영강풍음 2021. 7. 14. 00:16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은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강영안·문학과지성사·2005

   사랑은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는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이다. 너와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의 볼모가 된 자다.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랑을 가능케 한 호르몬이 작동하는 동안이지만 너를 위해 산다. 이는 “존재 안에서는 결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이다. 나는 너를 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너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레비나스는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레비나스의 중요 저작들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그의 철학은 대부분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할 게 틀림없다. 레비나스는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집안에서는 러시아 말을 사용하고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라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한 현상학자였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탈무드 선생이자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이고 프랑스 철학의 큰 흐름 속에서 사유한 철학자다. 레비나스는 반유대주의에서 비롯한 폭력과 인종주의가 널리 퍼진 서유럽에서 학대받는 유대인으로 산 경험과, 경험을 넘어서서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현상학의 맥락에서 자아와 타자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철학에 이어지는 주제다.

‘타인의 얼굴’은 레비나스의 나와 자기성, 타자와 고통을 통한 주체와 윤리학, 신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나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와 같은 구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고 썼다. 주체성이란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다. 레비나스는 도스트예프스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 레비나스가 주체의 철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운 타자의 윤리학은 나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 즉 대속자 그리스도에까지 밀고 올라간다.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자기됨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나타난다. 나의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행위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향유라고 한다. 향유는 나와 세계가 관계하는 방식, 신체를 매개로 한 생물적 교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기고 있을 때 무리에서 저를 분리해서 오롯한 ‘자기’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향유는 개체에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다. 나는 향유를 통해서 자기로 거듭난다. 즉 “즐김과 누림”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레비나스는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자, 여자, 아이와 같은 일상성과 밀접한 것들이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라고 강조한 철학자다.

타자란 누구인가? 타자는 낯선 이다. 그 낯섦은 차라리 타자의 본질이다. 낯선 것은 끔찍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자는 언제나 내 앞에, 지금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으로 서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을 가진 존재다. 타자는 내 앞에서 감추어진 그 무엇인데, 그것을 찾는 몸짓이 에로스다. 애무는 에로스의 현실태다. 애무는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을 만지는 행위다. 감추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비로소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 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타자란 모두 잠재적 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적대하고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고, 결국은 전쟁, 폭력, 인종청소와 같은 20세기의 비극은 나의 존재를 앞세우고 나의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서 나온 것이다.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서양철학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이라는 근본 악을 막지 못했다. 세 형제의 맏이인 레비나스는 두 동생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가 서양 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해 다르게 사유함을 하나의 철학 체계로 완성해낸 것은 이 근본 악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이 근본 악을 넘어설 수 있다.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

타자의 얼굴은 절대자가 인간에게 경험되는 처소이다. 타자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전적타자로서 우리의 사고를 통한 객관성에 들어 올 수 없는 자이며 우리사유의 모든 틀을 깨트린다.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4853#csidx7d90410d162aadeb7357416800f6f8e

 

[독서일기](20)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나는 곧 너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구? 어느 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읽다가 노트 한쪽 여백에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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