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니체가 말했다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영어로는Was that life? Well then! Once more!)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인용이 나오기에 검색해보니 이 책을 읽고 포스팅한 내용이 있어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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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족에게 바친다는 첫 장과 확연히 다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만인을 위하지만 또 그 어느 누구에게 바치는 것도 아닌 책”
1.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삶은 감당하기 힘들다" 라고. 그러나 그대들이 아침에는 긍지를, 저녁에는 체념을 갖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이와 같이 연약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귀여운 한 쌍의 나귀다. 그 몸에 한 방울의 이슬이 떨어져도 흔들리는 장미의 꽃봉오리와 우리는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옳다.
2. 삶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은 최고의 희망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의 최고의 희망은 삶의 최고의 사상이어야 한다.
3. 하나의 별의 빛이 그대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야 한다. 그대들의 희망은 "나는 초인을 낳고 싶다"는 것이다. 그대들의 사랑에는 용기가 있으라! 그대들의 사랑으로써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남자를 향해 돌진하라.그대들의 사랑에는 그대들의 명예가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명예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받는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언제나 더 좋아하고 결코 제 2인자가 되지 않는 것 - 이것이 그대들의 명예가 되게 하라.
4. 나는 강가에 있는 난간이다.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든 나는 곧 내가 창조한 것과 내 사랑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내 의지가 그렇게 원하는 것이다. ... 오직 삶이 있는 곳, 거기에 의지도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 권력에의 의지다!
6.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 유혹당한 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유혹한다. "달이 대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대지를 사랑하고 오직 눈으로만 대지의 아름다움을 더듬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물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모든 사물에 대한 깨끗한 인식이라고 부른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7. 그리고 그들이 나를 칭찬할 때에도 어떻게 내가 그들의 칭찬에 업혀 잠들 수 있는가? 가시 돋친 띠가 나에게는 그들의 칭찬이다. 이 띠를 풀었을 때에도 이 띠는 나를 할퀸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것도 배웠다. 칭찬하는 자는 보답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많은 선물을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8. 선의가 있는 곳에는 그만큼의 약점이 있음을 나는 본다. 정의와 동정이 있는 곳에는 그만큼의 약점이 있음을. (보잘것없는 평범한 행복에 파리처럼 몰려들어 위윙거리는 자기 상실자들) 그들은 서로 원만하고 정직하고 친절하다, 마치 작은 모래알과 모래알들이 원만하고 정직하며 친절하듯이. 작은 행복을 신중하게 얼싸안는 것 - 이것을 인종이라고 부른다
9.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언제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돼라! 커다란 사랑으로 사랑하고 커다란 경멸로 사랑하라!
10. "생을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영어로는Was that life? Well then! Once more!)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
알렉산더 네하마스 지음, 김종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경험상 책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이 도착하기 하루 전 다른 책들이 담긴 택배 상자가 도착했는데 그 안에 <니체전집>의 소개가 담긴 팸플릿이 들어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니체의 책들, ‘니체’를 쓴 책들을 읽을 때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팸플릿에서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니체의 책들은 다양한 스타일(혹은 모호한 태도)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역자에 의하면 니체 자신도 오독 되리라는 사실, 오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철학 교육과 강의로 잘 알려진 학자이자 『한 권으로 읽는 니체(What Nietzsche really said』의 저자이기도 한 한 로버트 솔로몬은 『니체 문학으로서 삶』에 대해 ‘놀라운 작품, 니체에 대해 씌어진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했다. 이 책은 약 이십 년 전, 1994년에 같은 역자에 의해 출간된 적이 있다. 역자에 의하면 이번에 출간한 책은 기존의 ‘원문 충실’한 번역과 달리 ‘의미 전달’에 초점을 맞추어 재번역했다고 한다.
막연히 읽고 싶던,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았던 스무 살 무렵『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펼친 적이 있다. 읽었다, 가 아닌 펼친 적이 있다고 쓴 이유는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끝까지 읽지 못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 이후로 ‘읽어야 하는데’와 ‘읽을 수 있을까’의 마음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세상에서 출간된 <니체 전집>은 모두 21권이다. 니체의 책들도, 니체의 책들에 관해 쓴 책들도 읽지 못한 상태 그러니까 이 책이 ‘니체에 대해 씌어진 가장 뛰어난 책’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니체 문학으로서 삶』을 읽었다. ‘니체’를 완전히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하니 네하머스의 해석 역시 불확실함을 내포하고 있지만 니체에 무지한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니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니체에게 자신의 글은 하나의 큰 세계를 이루는 작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니체는 경구를 즐겨 쓰며 과장법을 썼다. 네하머스는 ‘과장은 독자가 텍스트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한편 독자가 그와 논쟁을 벌이도록 만들어 준다.(69쪽)’고 했다. 네하머스에 의하면 니체의 원근법주의에는 ‘진리와 지식의 가치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야기(85쪽)’되었거나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해석일 따름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에 나타난 견해(85쪽)’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부분은 모여 전체를 이룬다. 부분은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부분을 알려는 노력, 특정한 삶을 알려는 노력, 사건을 재해석하는 일은 진정한 삶을 이루는 조건이 되거나 새로운 진리를 만든다(혹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니체에게 부분은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상호연관된 엄청난 대상들의 총합이다(183쪽).
“창조자들이여 그대의 삶에는 가슴 아픈 죽음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순간성의 대변자이자 옹호자가 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창조자는 동시에 아이를 잉태하는 어머니로서 출산의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133쪽)
니체는 다양한 눈들과 많은 생각이 결합하어 하나의 진리, 좀 더 완벽한 세계, 풍성한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니체에겐 ‘절대’라는 단어는 없는 듯 보인다. 같은 세상, 그것도 비극의 세상이 반복된다 해도 그것이 같은 세상일 수 없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한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독단주의를 비판했던 니체는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듯 독자들도 자신의 판단, 자신의 견해를 갖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삶의 양식이 바뀌기를, 독자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란 말은 ‘너 자신에 대해서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209쪽)’는 말과 같은 뜻일 것이다. 이 말은 삶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라는 말로도 읽힌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문장은 현재의 삶은 나의 판단과 책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말은 아닐까. 부분인 ‘나’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며, 부분의 ‘나’들이 변한 세계는 기존의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일 것이다.
네하마스의 책으로 ‘니체’에 한 발 담근 내가, 권력의지, 영겁회귀, 자아의 본질 및 도덕의 비도덕적 기원과 같은 관점들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니체’를 ‘나만의 니체’로 받아들여 나만의 삶을 창조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확실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긍정해야 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읽기 어렵지 않지만 니체에 무지한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한편으론 니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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