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클리토
예수님은 성령께 별명을 붙여주셨다. 파라클리토 성령이다. 라틴어로는 ‘파라클리투스’(paraclitus)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 한다. 여기서 ‘파라’는 ‘~옆에’라는 뜻. ‘클레토스’는 ‘불러서 세우신 분’이다. 합쳐서 ‘내 옆에 서 계신 분’이 된다.
구약시대 모세의 지팡이를 연상케 한다. 모세는 주님의 증표인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구약의 백성들은 추상적인 것을 잘 알지 못했고, 지팡이처럼 뭔가 시각적인 것을 좋아한다. 뭔가 번개 같은 걸 동원해서 오시는 하느님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모세와 백성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신 것이다. 그래 모세한테 “성령이 임했다”고 말로만 하면 확신이 덜하니까 주님께서 모세한테 큰 지팡이 하나를 주신 것이다.
“너 이거 들고 다니면서 딱 뻗치면 내 권능이 드러나리라. 이것으로 바위를 치면 어떻게 돼? 물이 터지리라”(탈출 4,1-9 참조).
우리에게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다들 지팡이 하나씩 줄게, 지팡이.” 성령은 결국 지팡이다.
이 파라클리토 성령이 신약에서는 더 확연히 드러난다. 작별의 때가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긴다. 이때 예수님은 파라클리토 성령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파라클리토),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자신이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그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이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나중에 실제로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다.
파라클리토는 이처럼 대변인, 보호자, 위로자라는 뜻 외에도 ‘깊은 한숨’, 곧 탄식의 의미도 있다. 말 그대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로마서 8장은 이런 파라클리토 성령을 필요로 하는 인류 전체, 더 나아가 이 지구의 상태를 잘 요약해 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성령은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시기까지 한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탄식이 뭔가. 한숨, 신음…. 내가 병석에서 끙~ 하고 내는 소리는 누구 소리인가? 성령의 소리다. 성령의 신음소리다. 그러기에 그저 벽만 바라보고 끙~ 그러면 내 작은 신음소리지만, 하늘을 바라보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 한숨기도, 신음기도를 잘 바치자.
성령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무한합니다. 그 가운데 하느님의 자녀들이 더욱 갈급하는 성령은 뭐니 뭐니 해도 ‘파라클리토(성령)’입니다. 파라클리토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어로 파라클리토는 마치 대변인이나 변호사처럼 ‘곁에 서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심한 박해를 받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의미는 큰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성령의 내주(來住)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둘째, 파라클리토는 큰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위해 파라클리토는 큰 소리로 확신을 심어 주고 사기를 진작시킵니다.
셋째, 파라클리토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깊은 한숨’, 곧 탄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십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신음)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탄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말로 표현하지 못해 칭얼대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으십니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이가 울 때, 아이가 배가 고파서 우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해 우는지, 아니면 어딘가 아파서 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기에 다 똑같은 소리지만, 어머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왜 우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합니다.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무기력함이 어머니의 동정심을 더욱 강하게 유발시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감수성으로 우리의 신음소리를 분별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무기력함 속에서 역사하기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약함 속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항상 찾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정체를 알지 못하는 괴로움을 정확히 찾아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는 그 사이의 공백을 채워 주십니다. (차동엽, <여기에 물이있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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