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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풍물/지역명소와 유래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

영강풍음 2021. 7. 15. 17:08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에 대한 넋두리

 

  영주에 온지 만4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영주에 와서 봉화를 가다가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이란 안내간판이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왜 이몽룡이 여기서 나와? 춘향전하면 전라도 남원인데 말이야! 그래서 답사를 했는데, 안내 간판이 불확실해서 찾느라고 한참을 헤맸었다. 영주시에서 만들어 놓은 인문학 둘레길 안내간판을 따라 읽어보며 공부를 했다. 돌병풍처럼 되어 있는 설명을 보고 나서야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이란 표현을 이해 하게 되었다.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은 내가 살고 있는 다미안의원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성이성이 말년에 지냈던 계서정이 있을 뿐 아니라 산으로 올라가면 성이성의 묘소가 있다. 또한 성이성의 묘소까지 가는 길에는 봉화정씨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선생의 묘소도 있다. 이런 사연이 있는 명소가 내 사는 곳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에 대해 짧게 정리하면,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봉화출신의 성이성이라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이성은 어린나이에 남원부사로 가는 아버지(성안의)를 따라 남원으로 가서 살았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의 스승으로 조경남을 소개해 주었고, 이때부터 조경남과는 스승과 제자이자,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 성이성이 호서 호남암행어사로 몇차례 활동할 때 꼭 남원에 들려 조경남과 진한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이 조경남이 성이성과 이춘향의 애정 스토리를 기초로 하여 권선징악의 소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성을 서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성이성을 몽룡으로, 이춘향을 춘향으로 묘사했다고.

   영주시에서 조성한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은 제목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몽룡 인문학 둘레길"이란 표현을 접할 때 선뜻 그 내용이 다가오지 않는다. 인문학이라는 말도 어려운데다 이몽룡이 인문학과 무슨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든다.  차라리 글자수가 좀 많아지더라도  "이몽룡의 실제적 모델 성이성 둘레길"로 표현하는 것이 이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듣도록 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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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당(西)

계서당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이 1610년(또다른 문헌에는 1613년)에 건립하여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우리 건축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고전에 대한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조상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향토애를 배양하도록 도와준다. 고대 소설 속의 인물이 실제 인물이었다는 것에 새로운 흥미를 갖게 해 주며, 우리 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과 자랑스런 긍지를 갖게 해 줄 수 있다. 또, 옛 시대의 가옥구조 및 생활방식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으며, 옛 선인들의 지혜로움을 배우고 현대의 건축 문화와 비교해 볼 수 있다. 

계서당(西)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고택이다. 봉화읍에서 부석사로 가는 915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물야면 소재지에서 서쪽 방향으로 ‘전백당()’이라는 편액과 함께 걸려 있다. 이 가옥은 최근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도령과 관련하여 이목이 집중되는 가옥이다. 이 집과 이도령의 관련성은 이렇다. 계서(西) 성이성(, 1595~1664)의 아버지인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공부를 했고 이후 과거에 급제한 뒤 암행어사로 네 번이나 출두, 암행어사의 표본이 됐다고 한다.

이후 성이성은 출사를 여러 번 거절한 뒤 봉화에서 이 계서당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다. 최근 학자들과 종손의 말에 의하면 성이성의 암행과 권선징악을 실천한 점 등에 미뤄 아버지 성안의의 친구가 춘향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인 성이성이 바로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다. 춘향전 집필 당시 양반의 실명을 바로 거론하기에는 시대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성을 이씨로 바꾸고, 대신 춘향의 이름에 ‘성’씨를 붙였다는 설명이다. 춘향전 등장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봉화군은 계서당 입구에 ‘춘향전의 실존 인물 이몽룡 생가’라는 안내판을 세우고, 봉화를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주변 환경을 가꾸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위 내용출처:성이성 생가 계서당

 

계서정(溪西亭)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계서정은 처음에  계서초당(溪西草堂)’으로 불렸다. 계서정은 성이성이 낙향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계서초당은 그 뒤 계서정(溪西亭)’으로 이름이 바뀐다. 정조 시기다. 초당은 세월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시달려 주춧돌과 섬돌이 기울고 넘어졌다. 후손은 그 터에 새로 집을 지었다. 그는 방 한 칸이던 초당에다 툇마루와 방 하나를 덧붙여 증축했다. 띠로 덮은 지붕은 오래 유지되도록 기와로 교체했다. 그는 기와를 올린 뒤 조상의 청빈 정신을 훼손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후손은 병조판서 채제공을 찾아 그 뜻을 전하고 계서정의 내력을 담은 기문(記文)을 부탁한다. 지금 이곳의 현판은 계서정이다. ‘계서초당이란 편액은 정자 안에 걸려 있다.  낙향한 지 2년 뒤인 1653년 성이성은 창원부사로 다시 부름을 받는다. 이 계서정을 영주시에서 다시 복원을 하고 뒤이어 인문학둘레길을 조성하게 된다. 계서정은 말년에 성이성이 살았던 곳이자, 뒷산으로 올라가면 성이성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에 소중한 곳이다. 영주시에서는 재전제자들을 퇴계 이황과 율곡이이의 사상이  함께 조우하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몽룡과 사진 찍는 곳, 성춘향과 사진찍는 곳(포토존)이 있고, 성이성과 관련된 여러 일화를 소개한 팻말들이 있다. 성이성의 묘소까지 가는 길에는 봉화정씨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선생의 묘소도 있다.

 

성이성의 호남 암행어사 시절 이야기는 그 유명한 <춘향전>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 소설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존인물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는 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성경(72)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이 학설을 대표한다.

 

아래 내용은 춘향전 실제 모델, 성이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 고전 가운데 이른바 ‘국민소설’로 ‘춘향전’을 꼽는데 이견이 있을까.  ‘춘향전’에 대한 애착은 이미 20여 번이나 만들어진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아름답고, 지적이고, 지고지순하면서도 열정적인 춘향이와 잘 생기고 집안 좋고, 은근한 위트의 이몽룡의 사랑, 거기에 방해꾼 변학도와 감칠맛 나는 조연 향단, 방자, 월매,  그리고 순탄치 않았던 사랑의 극적 해피 엔딩,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성의 피를 빠는 탐관오리가 정의의 어사 출두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은 공공연한 사회악에 울분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마저 준다.

 그러나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우리 고전 작품들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떤 기준을 갖고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

 춘향전과 관련된 근원 설화만 하더라도 박색설화, 열녀설화, 암행어사 설화, 성이성 설화 등이 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 창작된 소설 춘향전의 이본만 해도 무려 120종이 넘을 정도다.

 

 남원에 춘향이라는 기생이 있어 아자제 도령을 사모하다가 죽었으므로 원귀가 되어 남원에 재앙을 가져오므로 액풀이하는 제의설에 근원을 두고, 양진사가 제문으로 창작했다는 신원설화가 있다. 노진, 조식, 성이성, 김우항(, 박문수 등 고사에서 야담으로 형성된 암행어사 설화, 열녀설화, 조선조 야담에 보이는 도령과 기생과의 애련설화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춘향전은 한국 고대소설의 대표작으로 판소리 12마당의 하나이다. 조선 영조, 정조 전후의 작품으로 추측될 뿐, 작자, 연대는 미상이라는 설이 가장 많다.

 그런데 남원의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지냈던 조경남(趙慶南, 1570-1641)장군을 고소설 ‘춘향전’의 원작자로 본 ‘춘향전’이 있어 눈길을 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설성경교수는 ‘춘향전의 비밀(서울대 출판부, 2002)’과 ‘춘향전(책세상, 2005년)’을 통해 소설 ‘춘향전’은 남원에 살았던 조경남장군이 1640년쯤에 쓴 것이 확실하다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특히 단행본 ‘춘향전’은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 1561-1629)의 아들인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을 주인공 이몽룡의 모델로 삼은 게 ‘원춘향전’이라는 주장이다.

 조경남장군은 가상 인터뷰를 통해 원작자 조경남이 직접 ‘춘향전’의 집필 배경과 성이성이란 인물에 대해 밝히고 그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성이성이란 인물을 모델로 ‘원춘향전’을 창작했다는 것은 설교수의 학설이다.

 

 춘향전의 저자와 집필 연대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처음으로, 더욱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오늘날 독자들은 춘향을 미모와 덕성을 갖춘 이도령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춘향전’은 춘향의 사랑과 수절만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변사또에게 굴복하지 않고 이몽룡과의 약속을 지킨 춘향은, 자신이 정한 약속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아름다운 인간이다.

 즉, 원작자 조경남은 ‘춘향전’을 통해, 천한 기생인 춘향도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켜 열녀가 되는 마당에 나라를 위해 목숨이라도 던져야 할 지체 높은 사대부들은 임병 양란 동안에 그런 충성과 절의를 보여주지 못한 부끄러운 사실을 풍자하고자 한 것이다. 옥중에 갇힌 춘향이 곤장을 맞으면서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고 절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 인물 성이성이라는 것. “‘속잡록(續雜錄)’ ‘역대요람(歷代要覽)’, ‘소견록(逍遣錄)’, ‘병옹자전(病翁自傳)’을 쓴 조경남의 문집과 그의 제자 성이성이 쓴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이 결정적인 단서였습니다. 조경남의 문집에 자신의 대표작이 ‘춘향전’임이 기록돼 있고, ‘호남암행록’을 통해 이도령의 모델을 찾아낸 것이죠.”

 조경남장군은 당시 남원부사였던 부용당 성안의의 부탁으로 아들 성의성을 가르쳤고, 성이성은 과거 급제 후 1639년 암행어사로 남원에 몰래 내려와 스승 조경남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호남암행록에 자세히 열거돼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됐으며,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 높던 청백리였다. 먼저, 춘향과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의 나이에 성이성이 남원에서 지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부임한 것은 선조 40년(1607년), 이때부터 광해군 3년까지 5년 동안 남원에 머물렀다. 이때 성이성의 나이는 13세부터 17세 사이. 16세에 춘향을 만나 사랑하고 그 이듬해인 17세에 헤어진 이몽룡과 같다. 또, 성이성의 성품이 곧아 여러 차례 어사로 임명돼 암행했었다는 사실도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성이성의 호를 딴 계서당(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중요민속자료 제171호)은 생가이자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양성에 힘쓴 곳으로 전해졌다. 봉화지역의 문신 성이성이 춘향전의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자 봉화군이 이를 부각시켜 그의 생가를 ‘고전적인 사랑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며, 그 하나로 ‘이몽룡 테마타운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원이 춘향이면 봉화는 이도령’으로 등식을 성립한 셈이다.

 조경남은 자신을 찾아온 제자 성이성과 함께 광한루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제자를 이도령의 모델로 삼아 ‘원조 춘향전’이라 할 최초의 춘향전을 지었다.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대목에 나오는 ‘금준미주(金樽美酒)’란 시를 처음 소개한 이가 조경남이란 점도 조경남이 춘향전의 저자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대목이란다.

 ‘어사께서 곧 종이 한 장을 청하여 시를 쓰기를, ‘항아리 속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쟁반 위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구나’……’ 여러 사또들이 돌려 보고서 의아해할 때에 서리들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며 곧장 들어오자 여러 사또들이 한꺼번에 모두 흩어졌다’

 그런데 이 시는 조경남장군이 ‘속잡록’에서, 명나라 장군 조도사가 광해군의 흥청대는 궁중 잔칫상을 보고 읊은 풍자시라고 소개한 바 있다.

 조경남장군은 후에 ‘춘향전’을 쓰면서 이 어사가 변 사또를 향해 부른 것으로 이 시를 허구화했고, 성어사의 후손들은 허구 속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선조 성이성의 실화라고 전하게 됐다. 조경남장군이 ‘속잡록’에 인용한 시 ‘금준미주’가 ‘춘향전’의 암행어사시와 같다.

 

 또, 설교수는 조경남의 ‘원춘향전’(1640년)이 이도령 중심의 이야기였으나 18세기에는 춘향 중심으로 바뀌었고 19세기에야 이도령-춘향 중심으로 발전해왔음을 밝힌다. 이러한 판본 가운데 가장 정제된 결정판은 대중들이 가장 즐겨 읽어온 완판 84장본 ‘열녀 춘향수절가’이 아닌가.

 설교수는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즉, 옛 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설교수는 조경남이 남원에서 평생을 보냈고, ‘난중잡록’ 등의 역사 기록이나 ‘병옹자전’ 등 문학성이 짙은 작품을 남긴 상당 수준의 문필가인 점도 그가 저자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단행본 ‘춘향전’이 신분철폐, 신분상승을 열망하는 이름없는 민중들의 소산이라는 학계의 통설을 뒤집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붕괴에 봉착한 봉건질서의 회복을 꿈꾼 유학자의 작품이란 점이 주목되지만, 이를 뒤엎을 반론 또한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출처: 절용·애민·청렴의 청백리 계서 성이성

 

이몽룡인문학둘레길(영주시청공식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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